무도의길

태극권 일대 권사 장세충

★☆★☆★★☆★ 2022. 1. 31. 10:30

장세충 노사는 1912년 1월 15일 하북성 정해현에서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6남매중 5번째로 태어나셨다. 어려서 부터 무술을 좋아해 소년 시절부터 가까이 있는 무술가에게 소림권을 학습하게 된다. 그후 20세경 천진에 있는 하북성 국수관에 입교한다. 하북성 국술관은 중앙 국술관의 하부 조직으로 군벌을 이끈 허난주선생이 설립하였다. 초창기에는 천진에 있었으나 후에 북경으로 이전하였다.

 

고문으로는 손록당선생이 있었으며 3년과정의 전료제무술학교로 되어 있다. 지도는 부관장으로 있는 고선운이 맡아 하였으며 장선생은 최초로 태극권을 배우다가 허난주 관장의 장남인 허가복의 눈에 들어 선택된 몇명의 학생들과 특별히 팔극권을 배우게 된다. 허가복의 사부는 신창 이서문으로 되어 있다. 허난주사 군벌로 있을 당시 이서문을 초빙하여 자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게 했다. 이때 부관장이 곽전각이었다고 한다.

 

장선생은 오전에는 일반 학생들과 함께

공통의 무술을 지도 받고 저녁 8시경 부터 10시까지어떤때는 12시넘어서 까지 허가복의 특별 교육을 받았다. 무술 지도는 매우 엄격했으며 앞에서 배운 형이 잘 되지 않으면 다시 반복했으며 타인에게는 절대로 팔극권을 배운다거나 보이는 것을 엄격히 단속하였다고 한다. 장선생은 일생에 단한번의 자유 시합에 나간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시합에서 상대편의 가슴을 장으로 치다 앞쪽으로 기울어 지면서 상대와 코가 부딪혀 다량의 코피를 쏟았다고 한다. 그래서 시합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 시합이 일생의 한번 시합이었다고 한다.

 

일화로 진발과 노사도 북경에 있을때 시골 청년이 시합을 청하며 진노사를 밀어 붙치자 계속 뒤로 밀려나다가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때 진노사가 순간 청년의 팔을 꺽었다고 한다. 그래도 계속 청년이 밀어 붙치자 노사께서 자꾸 그러면 자네 팔 불러져 그만 하라니까 하자 그제서야 중단하고 사과를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실전에 많이 싸웠다는 일화는 많지만 진실을 보면 그리 많은 시합을 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순싯간에 상대를 죽였다거나 하는 것은 거의 유언비어 수준으로 보는것이 타당할것 이다.

 

장선생은 졸업후에도

허가복의 조교로 국술관에 남아 허 선생이 외출시 학생들은 지도하곤 하였다한다. 이때도 간판은 태극권으로 되어 있다. 이유는 팔극권은 비밀의 무예로 전수 되었기 때문이다.

 

장선생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된다. 상해의 얼굴 서철책의 눈에 들게 된다. 서철책은 청방(중국의 비밀결사)의 거대 인물이며 재벌로 세계홍만회의 초대 인대물 장종원이라는 인물과 산동 자치연군을 조직한 인물이다. 장세충은 서의 비서겸 경호원으로 서를 만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은 먼저 만나 가부를 결정 하였다고 한다,.

 

1941년 한번의 일본 방문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후 전후에 중국 본토를 떠나 일본으로 오려 했으나 실패 그후 홍콩에 1년여 거주후 1949년 2차로 일본으로 오게 된다. 일본에 온 후 동경에 중국 요리집을 개업하게 된다. 재차 중국본토를 가려 했으나 정변으로 돌아가기 힘들어 지자 화상으로 계속 일본에 머무르게 된다.

 

1980년 전일본 중국 권법 연맹을 이끈 좌등 김병위 노사와의 인연이 되어 당 연맹 본부 도장에서 단기 팔극권 강좌를 열기도 하였다.그후 일본에 팔극권 연구회가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현재 고식의 팔극권을 전한 일대 종사로 매우 귀중한 형으로 현재도 일본쪽에서 전수되고 있다. 장노사는 1996년경 중국 항주에서 자전거와 부딪치는 사고로 허리가 골절되어 수개월 요양을 하면서 기력이 급격히 쇠하게 되었다. 그후 1999년 4월 29일 서거하게 된다. 젊은 시절 청방의 비밀결사 요원으로 활약하면서 파란 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분의 팔극권일세대의 기법은 널리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으리라